나의 이야기

Buffalo의 멸종

정성연 2013. 8. 27. 16:08

아메리칸 들소를 가리키는 버펄로(buffalo)는 과학적으로 올바른 이름은 아니다. American bison이라고 하는 게 맞다. 그런데 미국에선 bison(1774년부터 사용)이라는 단어 이전에 1625년경부터 buffalo라는 단어가 사용돼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buffalo라고 하니 우리도 그냥 따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북미 대륙에 백인들이 나타나기 전 대평원의 주인공은 버펄로였다. 버펄로는 인디언의 주요 식량이었지만, 버펄로와 인디언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었다. 인디언은 자신들의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버펄로를 사냥했기 때문이다. 버펄로에게 비극이 닥친 건 백인들의 총질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미국의 화가 알버트 비어슈타드가 그린 [버팔로의 최후](1888).

“버펄로 한 마리를 죽이면 인디언 열 명이 죽는다”

유럽인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 북아메리카엔 4천만 마리의 버펄로가 있었는데, 1830년대부터 고기와 가죽을 목적으로 하는 상업적 사냥이 시작되면서 1850년엔 2천만 마리, 1865년엔 1천5백만 마리로 줄었다. 남북전쟁(1861-1865)의 종전은 버펄로에겐 재앙이었다. 이제 본격적인 인디언 사냥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865년 7월 군 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 1822-1885)는 정부가 보조하는 철도 건설을 위해 군의 2인자인 윌리엄 테쿰세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 1820-1891) 장군에게 평원의 인디언을 제거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1866년 셔먼은 그랜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우리는 인디언 도둑떼가 철도의 건설을 방해하거나 중단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수우족 인디언을 여자와 아이들까지 완전히 멸종시키는 보복 전쟁을 열심히 전개해야 합니다.” 이어 셔먼은 휘하 군대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인디언 촌락을 공격할 때 병사들은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를 구분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저항이 있을 경우에는 즉각 죽음을 내려라.”1)

인디언 사냥엔 수백 명의 해방 노예들이 가세해 ‘버펄로 부대’를 형성했다. 왜 하필 이름을 ‘버펄로 부대’라고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시기 인디언 살육의 가장 유명한 투사는 셔먼과 더불어 서부군 사령관 필립 셰리든(Philip H. Sheridan, 1831-1888)이었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은 “선량한 인디언은 오로지 죽은 인디언뿐”이라는 내용의 공동 발표문에도 나란히 올랐다.2)

1867년 셔먼 장군은 “올해 인디언을 많이 죽일수록 내년에 죽일 인디언이 그만큼 줄어든다. 우리가 인디언을 죽여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이들은 모조리 죽이거나 거지 종자로 남겨두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이 보면 볼수록 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3)

1870년 미국의 전쟁 부서가 인디언들의 양식인 버펄로를 제거함으로써 인디언 정책을 학살에서 굴복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함으로써 이제 인디언 소탕의 주요 방법은 ‘버펄로 죽이기’로 나타났다. 그 결과 1875년경에는 그 중 1천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1870년대 말에는 거의 멸종되고 말았다.4)

버펄로가 사라지자 인디언들은 생존을 위해 미국 정부의 식량에 의존하게 되었고, 끝내는 대평원을 백인들에게 내주고 좁은 보호구역에서 연명하는 길을 걷게 된다. 쉐리던은 텍사스 입법부에서 버펄로 사냥꾼들이 “골치 아픈 인디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난 30여 년 동안 전체 정규군이 거둔 성과보다 더 많은 기여를 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버펄로 사냥의 캐치프레이즈는 “버펄로 한 마리를 죽이면 인디언 열 명이 죽는다”였다.5)

부유한 동부인들과 유럽 왕족 사이에 퍼진 버펄로 사냥 열풍

버펄로를 철도 운행의 적으로 여긴 철도회사들은 자체적으로 버펄로 사냥을 위한 거대한 수렵 탐험대를 조직했다. 버펄로 사냥은 인기 있는 스포츠 행사로 부유한 동부인들과 유럽 왕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철도회사는 움직이는 기차에서 편안하고 안전하게 직성이 풀릴 때까지 버펄로를 향해 마음껏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고 광고했다. 사냥을 구경한 한 관찰자의 증언이다.

“여객 열차가 서서히 평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간혹 차량과 버펄로가 1-2 마일 정도 나란히 달려가곤 했다 (…) 이런 경주가 시작되면 일제히 차창이 열리면서 불쑥 고개를 내민 장총들이 밀집해 있는 무리를 향해 수백 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많은 수의 버펄로들이 그 자리에서 털썩 쓰러졌고, 그보다 더 많은 수가 달아나다 협곡에서 죽음을 맞았다. 열차는 계속 일정한 속도로 달렸고 그런 광경은 몇 마일마다 되풀이되었다.”6)

수많은 엽기 무용담들이 만들어졌다. 1,500여명의 사냥꾼이 부채꼴로 서서 평원을 향해 한꺼번에 총질을 했다거나, 죽은 버펄로에서 벗긴 가죽을 쌓았더니 무려 4에이커(16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산이 생겼다는 이야기들이 기록으로 남겨졌다.7) 보다 못한 <덴버 로키 산맥 뉴스>지는 1872년 5월 평원의 스포츠 사격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지나가는 열차로부터 무자비하게 총질을 당한 버펄로들의 사체가 버펄로 지대를 관통하는 철도 양쪽에서 서서히 썩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철도지구 총경의 명령으로 열차에서 총질을 금지하는 규약을 강제로라도 시행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8)

‘버펄로 죽이기’의 와중에서 한 ‘서부 영웅’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버펄로 빌(Buffalo Bill, 1846-1917)이다. 본명은 윌리엄 프레더릭 코디(William Frederick Cody)인데, 버펄로 사냥을 잘 한다고 해서 ‘버펄로 빌’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혼자서 8개월 동안 4,280마리의 버펄로를 사냥했다나. 그런가하면 전설적인 서부 총잡이인 빌리 콤스톡(Billy Comstock)과 8시간 동안 누가 버펄로를 더 많이 사냥하는가 하는 내기에서 이김으로써 얻은 타이틀이라는 설도 있다. 콤스톡이 49마리를 사냥한 반면, 코디는 69마리를 사냥했다고 한다. 코디는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용맹을 떨쳐 1872년 미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받기도 했다.9)

1875년의 버팔로 빌(왼쪽). 본명은 윌리엄 프레더릭 코디(William Frederick Cody)인데, 버펄로 사냥을 잘 한다고 해서 ‘버펄로 빌’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오른쪽은 1885년 인디언 수우족의 영적 지도자 시팅 불(Sitting Bull)과 함께 찍은 사진.

전설의 ‘크레이지 호스’와 ‘장발’ 커스터의 싸움

버펄로의 운명은 곧 인디언의 운명이기도 했다. 대평원에서 쫓겨나 보호구역에 수용된 인디언 부족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숫자가 많은 부족은 수우(Sioux)족으로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주의 블랙 힐스(Black Hills)에 살고 있었다. 다코타는 수우족의 언어로 친구나 동지라는 뜻이었지만, 수우족에게 친구와의 이별을 요구하는 또 다른 비극이 닥쳤다.

1874년 6월 30일 캔자스의 제7기병대를 이끌고 있던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George Armstrong Custer, 1839-1876) 대령은 블랙힐스에서 콩알만한 금을 발견하고 이를 미국정부에 알렸다. 수우족에겐 그 땅을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수우족이 그런 명령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분노한 수우족은 샤이안족과 합세하여 몬태나 남부의 리틀빅혼(Little Big Horn) 강 유역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커스터는 남북전쟁시 23세의 나이로 의용군 임시 장군으로 진급해 최연소 장군을 기록했다가 전후 정상 계급인 대위로 돌아갔지만 계속 장군으로 불린 독특한 인물이다. 강렬한 인상을 드러내기 위해 머리를 길러 인디언들은 그를 ‘장발’로 불렀다. 남북전쟁때 남부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Robert E. Lee, 1807-1870) 장군을 끈질기게 추적해 항복을 앞당긴 것으로도 유명한 커스터는 매우 호전적이었다.

커스터(왼쪽)이 버지니아 주의 팰머츠에서 알프레드 플리슨턴 장군과 함께 말을 타고 있는 모습.

어느 날 커스터는 공격을 삼가라는 특별 명령을 어기고 2천에서 4천 정도의 인디언들이 그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다는 경고도 무시한 채 250명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했다. 이게 바로 1876년 6월 25일에 벌어진 그 유명한 리틀빅혼 전투다. 이 전투는 커스터 부대의 몰살로 끝났다. 도망치는 것을 보고도 인디언이 살려둔 병사는 오직 인디언 혼혈의 정찰병 한 명뿐이었다.

커스터 부대의 몰살은 커스터의 무모한 만용에 그 원인과 책임이 있었지만, 동부 신문들은 리틀빅혼 전투를 전혀 다른 내용으로 썼다. 건국 100주년 기념행사에 흥분해 있던 미국인들은 그 전투를 피에 굶주린 인디언들의 학살극으로 받아들였다. 이 전투에서 커스터의 두 동생과 조카 등 커스터 일가 5명이 모두 숨졌기에 신문들은 ‘커스터의 마지막 저항’이라며 커스터의 행위를 미화하고 낭만화했다. 그는 순식간에 문명의 편에서 야만을 퇴치하려다 산화한 순교자가 되었다.

백인들의 민심은 수우족에 대한 전면전을 요구했다. 결국 미국정부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수우족을 일망타진했다. 수우족의 영적 지도자 시팅 불(Sitting Bull, 1831-1890)은 400명의 부족을 이끌고 캐나다 지역으로 도피했다가 캐나다 정부의 외면으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항복했다. 수우족의 현장 지도자는 전설적인 전사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 1840-1877)였다. 그는 1877년 5월 몇 안 남은 수우족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도피했으나 1877년 9월 연방군의 덫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버펄로를 식량으로 삼고, 버펄로 가죽으로 옷과 천막을 만들어 살아왔다. 보호구역에서 빈둥거리며 사는 것보다는 사냥하며 살기를 원했다. 우리의 의지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부족할 때도 있었으나 보호구역을 떠나 사냥을 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살기를 원했다. 정부에는 아무런 재정적 부담도 지우지 않았다. 우리가 원한 것은 다만 평화였고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겨울에 병사들을 보내 우리 마을을 파괴했다. ‘장발’(커스터)도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공격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를 학살했다지만 우리가 끝까지 싸우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에게 똑같은 짓을 저질렀을 것이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부녀자들을 데리고 탈출해야 한다고 느꼈으나 사방이 가로막혀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10)

인디언이 카우보이로, 버펄로가 육우로 대체되다

케빈 코스트너(Kevin Costner)가 주연을 맡고 감독까지 한 영화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1990)에 나오는 인디언 종족이 바로 크레이지 호스의 수우족이다. 이 영화의 배경이자 촬영지도 사우스 다코타의 블랙 힐스 대평원이다. 이곳의 산봉우리에는 두 개의 암벽 인물상이 새겨진 걸로 유명하다. 하나는 러시모아 산(Mount Rushmore)의 대통령 얼굴 바위, 다른 하나는 크레이지 호스 얼굴 바위다.

러시모어에 새겨진 대통령 얼굴은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4명이다. 4개의 얼굴상은 크기가 같은데 얼굴이 18미터, 코가 6미터, 눈은 3미터다. 1927년 8월 10일에 시작돼 1941년 10월 31일 완공되었다. 여기서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러시모어 얼굴상보다 훨씬 거대한 크레이지 호스 조각상이 있다. 서울 남산만한 바위산의 정상부터 중턱까지를 깨고 다듬는 초대형 조각상이 1948년에 착공해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높이 169미터, 길이 192미터다. 50년만인 1998년 6월에 완공된 얼굴 부분만 27미터의 길이다. 앞으로도 100년 이상 걸려야 완공이 가능하다고 한다.11)

사우스 다코타에 위치한 크레이지 호스의 얼굴 바위. 1948년에 착공해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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