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위] 태조 이성계가 등극한 후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지리산 중턱 큰 바위 밑에서 은신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장수에게 그를 찾아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장수가 지리산을 헤매다 이곳에서 2km 떨어진 곳에 이르러 큰 바위 밑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발견하곤 칼로 치니 바위는 갈라져 홈바위가 되고 칼날은 부러지며 이곳까지 날아와 꽂히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형상의 바위로 변하였다고 하여 칼바위라 부른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망바위] 해발 1068m. 마치 경계병처럼 망을 보고 있는 듯한 모습 때문에 이름이 지어졌다한다. 조망이 그만큼 좋다는 의미라고도 한다. 망바위에 오르면 영신봉에서 시작된 낙남정맥 산줄기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법계사] 1450m.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지리산 천왕봉 동쪽 중턱, 해발 1450m에 있는 남한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절이다. 서기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면서 창건했고, 1405년 정심선사(正心禪師)가 중창하였다. 그 뒤부터 수도처로 알려져 고승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6.25전쟁 때 불에 탔지만 워낙 높은 곳에 있어 재건을 못하고 토굴로 명맥을 이어오다 최근에야 법당이 세워졌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제473호)이 법당 왼쪽에 거대한 암석을 기단으로 세워져 있다. 지리산 7대 사찰로 꼽히며 사찰 뒤로 암봉과 문창대가 보인다.
법계사는 전란 때마다 수난을 겪었다. 그 첫 번째가 고려 무왕 6년 9월에 남원의 황산벌에서 이성계에게 크게 패한 왜구들이 황급히 도망가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불태운 것(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쇠퇴한다는 전설 때문에 고려 말 왜적 아지발도에 의해 소실), 두 번째가 조선시대 재건돼 많은 불자들의 기도처로 이용되던 중 1908년 지리산이 항일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박동의의 의병부대가 덕산에서 패한 뒤 법계사로 후퇴, 계속 항일전을 벌일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화마에 휩싸였다. 세 번째는 1948년 여순반란사건을 겪으면서 지리산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토벌군이 대원사와 함께 불태워 버린 것이라 한다.
[개천문(개선문)] 천왕봉 서쪽의 통천문과 함께 천왕봉을 오르는 관문으로 여겨진다. 통천문처럼 신비스럽고 위용을 갖춘 모습은 아니지만, 마치 개선하는 기분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과거에는 왼쪽은 물론 오른쪽에도 비슷한 높이의 바위기둥이 서 있었지만, 지금은 오른쪽의 기둥은 붕괴되어 없어지고 왼쪽에만 높이 10m의 문설주가 있다.
통천문이 '하늘을 오르는 문'이라는 의미라는 점을 보면, 개선문보다는 개천문이 '하늘을 여는 문'이라는 의미에서 타당해 보임.
[천왕샘]1800m. 남강댐의 발원지. 여기에서 솟구친 물은 덕천강을 따라 흘러, 남덕유산 참샘을 발원지로 하는 경호강과 남강댐에서 합류하여 남강을 이루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6m 정도의 바위 밑에서 방울방울 흘러 모인 샘물로, 1977년 덕산 두류산악회에서 석공을 동원해 물이 고일 수 있도록 홈을 파놓았지만 가물 때는 쉽게 말라버리기 일쑤다.
깍쟁이처럼 바위에 졸졸 흐르는 정도의 양이지만, 남강의 첫 물. 강이 되고 바다가 될 그 시초다.
[천왕봉] 1915.4m. 남한 내륙의 최고봉. 3대가 덕을 쌓아야 천왕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속설과 더불어, 반드시 관문을 거쳐 들어오도록 하고 있다. 동쪽으로 개천문, 남서쪽으로는 통천문을 두어 이들 관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거쳐 들어오게 하고 있다.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라는 음각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천왕봉에 지금의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시작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기 전에는 '경남인의 기상'이 있었고, 그전에는 남명의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리지 않는다'는 뜻의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서산대사는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과 더불어 지리산을 평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엄한 산이라 했다.
-천왕봉의 성모상
아득한 옛날부터 지리산 신령을 봉안 했던 성모사가 자리해 있었으나 속인들의 끊임없는 욕심으로 자취를 감추고 빈자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성모상은 훼손된 채 사라졌다가 다행히 한 스님에 의해 찾아진 후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으나 제자리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천왕봉의 성모사는 1489년 이곳을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의하면 성모사는 천왕봉 "정상에 한 칸 정도의 돌담벽이 있고 담안의 너와집에 성상이 안치돼 있었다"고 전한다. 이 사당은 빨치산에 의해 허물어진 뒤 오늘날까지 노천암대만 남아 처량하게 수십 여성상을 보내고 있는 처지에 놓여있다.
[제석봉] 1808m. 천왕봉 서쪽에 있다.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정상 부근은 느슨하고 봉긋한 형태다. 과거에는 고사목이 즐비하여 별난 경치를 자랑했지만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 수도 많이 줄었다. '제왕이 자리했다'는 의미지만 천왕봉이 바로 지척에 있으므로 어울리는 이름 같지는 않다.
[장터목] 천왕봉의 자매봉인 제석봉의 남쪽능선 고개 마루를 장터목이라 부른다. 장터목은 옛날에 천왕봉 남쪽 기슭의 시천 주민과 북쪽 기슭의 마천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이곳에 모여서 장(場)을 세우고 서로의 생산품을 물물교환한 데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연하봉] 1730m. 장터목의 남서쪽 봉우리로 천왕봉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건너다볼 수 있는 위치다. 정상은 암장으로 형성되어있다. '지리8경' 중 '연하봉 선경'이 이곳에서 연출된다. '연기(煙연기연)가 노니는(霞놀하) 선경'이니 매우 아름답다는 뜻이다. 여기에서의 연기는 당연히 구름을 지칭하며 선경이라 함은 좁게는 바로 건너다보이는 천왕봉이고, 넓게는 천왕봉은 물론 중산리계곡과 거림계곡, 백무동계곡 그리고 겹겹이 둘러져 꿈틀대는 능선 등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촛대봉] 1703.7m. 옛날에 연진이라는 여인이 남편 호야와 대성계곡에서 행복하게 살았는데 자녀가 없어 고민하던 중 흑곰에게 세석고원에 있는 신비의 샘물을 마시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남편과 상의 없이 산신령이 금기시킨 영신봉 음양수를 마셨다. 평소 흑곰과 앙숙이던 호랑이가 산신령에게 일러바쳐 산신령의 노여움을 사서 평생 남편과 생이별한 채 철쭉밭을 가꿔야 하는 벌을 받았다고 한다. 연진 여인이 촛대봉 정상에 촛불을 켜고 천왕봉 산신령에게 용서를 빌다가 돌로 굳어버렸고 촛대봉 바위는 연진 여인이 굳어진 모습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평생 손끝에서 피가 배어나오도록 철쭉꽃을 가꾼 여인의 슬픔과 피가 이곳의 철쭉꽃을 처연하도록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 사람들은 믿었다 한다.
[세석고원]
오래전에는 작은 돌밖에 없는 토양지대라 해서 '잔돌고원'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 표현으로 바꾸어 세석평전이라고도 했는데 '평전(平田)'이 일본식 표기라는 의견이 있어 일반적으로 세석고원으로 불리고 있다.
사실 세석의 철쭉은 연한 빛으로 창백하기까지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설가와 문장가들이 자극적인 붉은빛으로 묘사한 이유는 과거 빨치산 투쟁 때 이곳에 김일성대학이 있었고, 또 많은 사람이 죽은 곳이라서 이들의 흘린 피와 절규가 한(恨)의 꽃으로, 즉 과거 이데올로기의 비극의 채색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현상의 남부군 주둔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이곳에서는 남부군의 군중대회와 연극공연 등이 열렸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토벌대에 포위되어 몰살을 당했던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이다.
경남 산청, 거림계곡, 함양의 백무동, 하동의 청학동 등 여러 지역과 연결되는 지리산의 중심지. 세석고원(細石高原, 1400m~1703m)은 약 30만평에 달하는 드넓은 면적과 남향으로 15도 경사를 이루며 완만하게 펼쳐진 지형이다. 이로 인해 남녘의 개마고원으로 불릴 정도로 지리산에서 가장 특이하고 인상적인 지형을 보이는 곳이다.
이곳에 자생하는 구상나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의 지리산, 한라산, 덕유산 등 높은 산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세석고원에는 200여 종의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고 한다. 또 세석의 철쭉은 '지리산 십경'의 하나로 '세석척촉'으로 유명하다.
[영신봉] 1651.9m. <산경표>에서는 낙남정맥을 '낙남정간'이라 하는데, 정맥의 시작되는 곳이 영신봉이다. 300~800m의 산들로 이어지는 낙남정맥의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이 되고, 영신봉에서 옥산에 이르는 구간의 남쪽은 서쪽의 섬진강으로 물을 보낸다. 그러나 낙남정맥이 동쪽으로 방향을 정한 뒤로는 남쪽의 바닷가로 물이 흐른다. 마산의 무학산, 김해의 익산을 지나 낙동강 하구를 지키는 동신어산에서 끝나는 낙남정맥은 내륙과 남부 해안지방과의 경계로 작용한다.
[낙남정맥] 지리산 영신봉(靈神峰, 1,651m)에서 낙동강 남쪽을 가로지르며 김해 신어산(631.1m) 지나 고암나루터까지 약 도상 232km에 이르는 산줄기.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영신봉에서 동남쪽으로 삼신봉, 봉대산, 무량산, 무학산, 천주산, 금음산 등으로 이어져 신어산에 이른다.
이 산줄기의 남쪽에는 대체로 경남 남서의 해안지방, 즉 하동·사천·삼천포·고성·마산·창원·김해가 위치한다.
[삼신봉] 1284.5m. 삼신봉은 어미의 품처럼 넓은 지리산 자락에 흩어진 수십 개 봉우리 중의 하나로 영신봉(1652m)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은 능선상의 최고봉이다. 또한 지리산 주능선의 전망대로서 참다운 가치를 가질 뿐만 아니라 악양으로 흘러내린 형제봉 능선과 멀리 남해 바다의 일망무제, 탁트인 전경을 선사해준다.
특히 인적 드문 비경의 남부능선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동으로는 묵계치를, 서쪽으로 생불재, 남으로는 청학동을, 북쪽으로는 수곡재와 세석고원을 이어주는 사통팔달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한다.
지리산 하동지역은 쌍계사, 칠불사 등의 절을 비롯하여 불일폭포, 화계계곡, 청학동, 도인촌 등의 볼거리도 많다. 청학동 마을에서 삼신봉을 바라보면 왼쪽부터 쇠통바위, 가운데는 내삼신봉, 오른쪽이 외삼신봉으로 세 개의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특히 삼신봉은 봄의 벚꽃 산행지로 이름 나 있다. 하동-쌍계사 십리 벚꽃길, 섬진강 60리 벚꽃길이 매년 4월 초순이면 장관을 이룬다. 수령 60년이 넘은 아름드리 벚나무가 구불구불한 계곡을 따라 활짝 필 때 벚꽃 산행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10리 벚꽃길은 젊은 남녀들이 걸으며 백년해로를 기약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서 '혼례길목'으로 불린다.
섬진강 벚꽃길 60리는 섬진강 꽃길 따라 60리를 간다. 구례에서부터 따라붙은 섬진강은 지리산에서 거친 숨결로 내려온 화개천과 만나 물줄기가 굵어진다. 이곳이 바로 화개장터로 불리는 탑리이다.
[청학동] 해발 800m의 지리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삼신봉 남쪽 자락에 그림처럼 펼쳐진 지리산 마을로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은거하기도 했던 곳이다. 전설로는 청학이 많이 노닐던 곳이라는 유래를 가진 곳으로 예로부터 수많은 묵객들이 삼신봉을 중심으로 한 살기 좋은 곳, 즉 이상향을 찾아 나섰던 곳이란 느낌이 들게 하는 산세와 물줄기를 가지고 있다. 청학이란 '푸른 학'이라는 뜻으로 전설에 의하면 청학은 신선이 타고 다니면서 도술부리는 새로서 사람의 몸에 새의 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儒佛仙三道合一更正儒道會>라는 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유교를 근간으로 하되 '유교, 불교, 선도와 동학, 서학을 하나로 합하여 큰 도를 크게 밝혀 유도를 다시 일심으로 교화하는 도'라는 뜻이다. 이들 대부분은 논밭에서 식량을 자급하고 양봉과 축산, 약초, 산나물 등을 캐다 팔고 하동 장에서 생필품을 구입해 쓰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언젠가는 그 이상의 세상이 여기에 올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청학 마을의 서당에서는 청소년에게 한학과 예절 등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곳엔 또 다른 설화가 있다. 옛날에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는데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나무꾼이 사슴을 잡으려고 쫓아가다 어떤 굴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 곳은 캄캄한 굴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별천지였다. 나무꾼이 한사람을 붙들고 이곳이 어디냐고 묻자 그 사람이 옛날에 세상의 난을 피해 들어와 살게 됐는데 지금까지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나무꾼은 푸짐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나무꾼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 곳을 찾으려 했으나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