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도
약초가 많아 ‘약산도(藥山島)’라 불렀다고 한다.
완도항에서 북동쪽으로 약 18km 해상에 해남 반도와 고흥 반도 정중앙에 위치한 섬으로 약초가 많아 약산(藥山)인 ‘약산도(藥山島)’는 ‘조약도(助藥島)’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남도 지역 섬 이름 가운데 ‘약(藥)’자를 지닌 섬은 이곳뿐이다.
약산도에는 삼문산(397m), 장룡산(356m)이 있는데 산세가 험하고 예로부터 희귀한 약초가 많이 자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선조 때는 정명 공주 궁방에 하사되기도 했다. 삼문산을 중심으로 삼지구엽초 등 129여 종의 약초가 나고 임금님께 진상되었다고 한다. 약재가 특산물이라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을 보면 약산도와 약초의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이곳에서 채취한 약재는 관서리 도청(진상용 약재를 관리하는 관청)에서 수집하여 포대 나루를 통해 직접 배를 통해 한양으로 올려 보냈다고 전한다.
이 섬에서 알아주는 약초가 바로 ‘삼지구엽초’이다. 삼지구엽초는 강장제 약초로서 3개의 가지에 3개씩 잎이 나 있고 익은 것은 뿌리가 노랗다. 또한 야생 질경이(도라지)도 흔하며 그 외에도 상출, 사삼(더덕), 하수오도 눈에 띈다. 산자락 주변 길에도 탱자나무, 보리수, 구절초, 참빗살나무, 노루발, 황련, 야생 도라지, 더덕 등의 약초가 널려 있다. 이렇게 건강한 섬에서 약초를 먹고 천연림이 우거진 섬 절벽에서 방목하는 흑염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사계절 내내 약초를 먹고 푸른 바다와 호흡하며 사는 흑염소. 사람들이 이곳 흑염소를 알아주는 이유는 너무나 당연한 듯하다. 사람도 먹기 귀한 천연 약초를 뜯어먹고 사는 흑염소이니, 약산도를 ‘약초를 먹고 사는 흑염소의 섬’으로 부르는 것은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이 섬에는 1,200여 가구가 산다. 김과 미역, 다시마 양식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데, 독특하게도 산에서 약초를 기르고 그것을 먹이로 흑염소를 길러 특산품으로 내다 팔고 있다. 방목 중인 흑염소 수가 2,000여 마리에 달해 약산도 인구가 2,515명인 것으로 보면 ‘사람 반 흑염소 반’이다.
매년 4월이면 김소월의 「진달래꽃」 시가 생각난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 오리다”의 약산은 완도의 약산이 아니고 평북 영변의 약산이다. 그런데 남한 약산과 북한 약산에 진달래 공원이 있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모두 자생적인 군락지이다. 완도의 약산은 북한의 약산처럼 늘 머나먼 섬으로 느껴졌지만 이제 머나먼 섬이 아니다. 분명히 완도의 부속 도서인 약산도는 과거에는 ‘섬 속의 섬’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의 섬 고금도를 거쳐서 들어가기 때문이다.
1999년 약산도와 고금도를 연결하는 약산대교가 건립됐으나 여전히 섬 지역을 면치 못해 오다가 2008년 강진 마량과 고금도 가교리 간에 고금대교가 들어서면서 덩달아 육지가 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그래서 육지에서 고금도를 지나 약산까지 차로 갈 수 있다. 3년 전 약산도를 찾았을 때 면 소재지에는 ‘고금대교 개통과 함께 약산 발전을 앞당기자’ 라는 플래카드가 여기저기서 휘날리고 있었다. 섬이 육지가 되어 주민들의 평생소원이 풀어진 흥겨운 순간이었다. 약산도는 이제 더 이상 섬의 지위를 상실했다.
이에 따라 해남 반도와 연결된 완도와도 지리적으로 가까이 연결되어 바로 육지로 드나들 수 있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의 섬이 되고 있다. 고금도 사람들은 다리 덕분에 약산 사람들만 좋아졌다고 농담을 한다. 고금도와 약산도를 잇는 약산대교 준공 후 약산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가지와 얼굴색이 달라 보였다는데 이제 고금대교를 통하여 육지로 연결되었으니 생활까지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다리가 들어선 이후 그만큼 약산면에 혜택이 많아지고 있다.
약산도 여행은 약산대교를 지나 천동리 마을부터 시작된다. 1960~1970년대 천동리는 완도읍으로 나가려면 녹동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도착하기 전, 종선(從船)으로 손님을 싣고 나가서 여객선으로 갈아탔던 곳이다. 고금도와 연도되기 전에는 강진 마량항에서 철부선으로 40여 분 걸려 약산에 도착할 때 내리는 선착장이었다. 그 당시에는 약산에서 제일 붐비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다리 때문에 을씨년스럽다. 그 유명한 천동리가 다시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매생이 덕분이다. 이곳 약산은 김 양식이 부류식으로 발달하기 전 1960년대 대나무를 쪼개 만든 김발을 막았던 장소다.
『자산어보』에도 지적했듯 매생이는 김발보다 수면이 얕은 곳에서 자란다. 지금은 매생이가 비교적 대중화되어 회자되지만, 과거에는 섬 주민들이나 미식가들 사이에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완도 약산에 매생이 양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4년도 채 되지 않았으나 점차 활성화되어 지금은 천동을 비롯한 주변 마을 화가리, 여동리, 장용리 등에서 주로 생산한다. 채취는 12월 중하순에 시작해 이듬해 2월 말까지 이어진다. 물때에 따라 긴 장화를 신고 들어가거나 작은 배를 타고 들어가서 작업한다. 보통 세 차례 정도 수확을 하고 매생이 발을 철거한다. 매생이 발 한 척에 600개의 대나무가 들어간다.
채취한 매생이는 갯가에서 바닷물로 헹군 다음 물기를 빼고 어른 주먹 모양으로 다듬는다. 이를 ‘재기’라고 한다. 400g 남짓한 무게로 모양은 꼭 옛날 여인 쪽머리이다. 값이 좋을 때는 4,000원에도 거래되었지만 최근 산지에서 2,500~3,000원에 거래되고 있다.
어민들은 누구나 차가운 하늬바람에 맞서 김발에서 엉겨 붙은 매생이를 뜯어낸 경험들이 있다. 지금은 작업장에서 ‘매생이 재기’를 만들며 눈치 없이 섞여 올라온 김을 뜯어낸다. 매생이와 김, 김과 매생이의 동침, 인생사가 그렇듯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천동리 마을의 반대편, 약산도 섬의 동쪽 끄트머리에는 당목항이 있다. 고흥군과 금일면, 평일도와 생일도를 연결하는 포구다. 당목은 옛날부터 고흥군과 금일읍을 연결하는 포구여서 ‘포촌’이라 불렀는데 포촌을 내려다보는 곳에 오래된 당나무가 있어서 ‘당목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을 입구에 딱 버티고 있는 나무는 영락없이 나그네의 발길을 끌어당길 정도로 묘한 마력을 지녔다.
현재 약산의 변두리 당목항이 크게 활성화되고 있다. 당목항 건너 생일면과 금일면 주민들이 육지로 나가는 큰 길목은 강진 마량과 고흥 녹동이었다. 강진 마량으로 나오려면 1시간 10여 분 동안 철선을 타야 했다. 그러나 고금대교가 들어서면서 약산면 당목이 주 통로가 됐다. 금일면 평일도에서 약산 당목항까지는 20분이면 차도선이 건너온다. 당목항과 금일면을 연결해 주는 철선이 하루 25회 운행되고 있다. 인근 가사리해수욕장에는 여름 피서객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연평균 10,000명이던 관광객이 최근 30,000명이 찾았다. 당목항을 이용해 강진과 광주로 향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 있기에 머지않아 당목항이 어떤 형태로든 개발될 것으로 보인다. 고금대교가 개통된 후 마량까지 오던 직행 노선은 고금도를 지나 약산도 당목항까지 뻗쳤다. 약산면의 한 주민은 “다리가 들어선 후 고금도와 약산에 빨간 직행버스가 들어온 게 가장 큰 변화라면 변화”라고 말했다.
당목항에서 약산도 일주 도로를 따라가면 ‘당목지’라는 조그만 저수지가 나타나고 그 길을 계속 가면 왼쪽 아래 내리막길로 해수욕장 가는 길이 나온다. 가사리로 가는 길로 왼쪽으로 돌아서 내려가면 마을 회관이 나타난다. 그리고 조금은 불편한 1차선 도로로 조금 더 내려가 다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왼쪽으로 민박촌이 나타난다. 이곳은 가사리 마을이지만 대부분이 민박으로 운영되고 있다.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서 내리막길로 들어서면 바로 가사리해수욕장이 나온다. 걸어서 갈 경우 내리막길 중간에 동백림 사이로 난 계단을 내려가면 해수욕장에 닿는다.
‘가사리해수욕장’은 약산도의 유일한 해수욕장으로 모래질이 곱고 경사가 완만하다. 리아스식 절벽 풍경과 동백나무 숲이 조화를 이룬 약 300m의 아담한 해변으로 100년 이상의 동백나무가 그늘을 드리워 준다. 동백나무는 마을 청년회가 관리한다. 백사장 주변에 짙푸르게 우거져 있는 동백나무 숲은 여느 해수욕장에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이고, 높은 산봉우리 바로 밑에 해수욕장이 펼쳐진 것도 이곳에서만 볼 수 있을 것이다.
해수욕장을 지나면 끝자락에 물탱크와 화장실이 있고 그다음 지점에 위치한 것이 포구이다. 그러나 배는 모두 다섯 척도 안 되는 작은 배들만 있을 뿐이다.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물양장에는 승용차 몇 대가 주차해 있는데 정박한 배보다 더 많은 차량 수다. 이곳 역시 낚시터로 알려져 있다.
가사리에서 일주 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계속 들어가면 좌우로 숲이다. 이 주위가 ‘삼문산 진달래 공원’으로 여기서 왼쪽의 높은 봉우리가 바로 탁 트인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삼문산(三門山)이다.
삼문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옛날 주능선 동쪽 분지인 삼개문(일명 삼감안)에서 땔감으로 쓰는 초나무나 풀을 베어 지게에 메고 서쪽 천동나루 방면으로 넘어올 때 망봉과 등거산 사이 움먹재나 망봉과 장룡산 사이 파래밭재와 큰새밭재를 넘어 다녔다. 즉 세 고개를 세 문(門)으로 보았던 것이다. 고구마가 고금도에서 유래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산자락 주변 길에는 탱자나무, 보리수, 구절초, 참빗살나무, 노루발, 황련, 야생 도라지, 더덕 등의 약초가 널려 있다.
평범한 육산인 삼문산에는 토끼바위, 쟁기바위, 부엉이바위 같은 특이한 모양의 바위들이 변화를 꾀한다. 그러나 삼문산의 매력은 사방으로 펼쳐지는 남해와 여기저기에 떠 있는 다도해의 그림 같은 풍경에 있다.
당목항 너머 섬 끝자락에 조그만 섬 하나가 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이 예로부터 ‘섬어두지(섬어장머리)’라 부른 곳으로 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이다. 바다 동쪽이라 하여 ‘해동리’라고 부르다가 행정 구역 개편 때 마을 이름을 다시 ‘어두리(漁頭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1983년에는 해저에 침몰한 선체의 인양 작업을 통해 앞바다에서 청자 등 3,000여 점의 유물이 인양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두리에는 느티나무 세 그루가 엉키어 한 나무가 되어 자라고 있다. 이를 ‘삼성수(三姓樹)’라고 부른다. 어두리에 처음 입주한 김씨, 박씨, 권씨 세 성씨가 결의를 맺고 형제로 살기로 하면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각기 한 그루씩 심었다고 한다. 270년 동안 거목으로 자랐으나 결국 고목(枯木)으로 넘어진 후 1960년 그 자리에 은행나무를 심어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제를 지내고 있다.
일주 도로를 타고 계속 가면 득암 바로 옆이 사동이고 그곳을 지나면 구암리다. 흑염소들의 몸이 성하지 않을 정도로 약산도 산에는 돌이 많다. 산에는 멀리서 바라보면 이 돌조각들이 산비둘기처럼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흔적이 많은 바위를 일러 ‘꾸뜰바리’라 부르는데 지금은 비둘기 구(鳩)자를 붙여 ‘구암리’라 부르고 있다.
일주 도로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매립지가 보인다. 바둑판처럼 반듯한 사각형의 논들이 즐비하다. 오른쪽은 매립지인 논이고 왼쪽은 담수호인 약산호이다. 바로 앞에 방조제가 만들어져 물을 막아 놓았다. 바로 ‘관산 방조제’이며 그 뒤로 ‘우두 방조제’가 있다. 우두 방조제 끝에 있는 작은 마을이 우두 마을. 넙고리 북쪽 산에서는 옥(玉)이 나온다. 이 마을을 옥산리(玉山里)라고 부르다가 해방 이후 우두리, 다시 넙고리가 부르고 있다. 그리고 넙고 마을은 천동 마을 북쪽에 특이하게 생긴 지점에 위치해 있다.
약산도의 서쪽에 위치한 득암항. 여기서 마주 보이는 섬이 바로 완도 본도와 연결된 신지도다. 이곳 물양장은 매립한 탓에 상당히 넓은 편이다. 그래서 수산물 가공 공장을 비롯하여 창고와 다양한 어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득암항 표지석에 의하면 득암항은 지난 1994년 5월부터 2006년 3월까지 장장 12년의 공사를 거쳤다고 한다.
물양장 한가운데에 단층의 경로 복지 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복지 회관치고는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 2층짜리 득암 청년 회관은 물양장 끝자락에 잘 만들어 두었다. 선착장은 포구 규모에 비해 상당히 큰 편으로 포구 앞 방파제에는 두 개의 등대가 있다. 포구 끝에서 마을을 쳐다보면 마을 뒤로 삼문산 정상이 뚜렷하게 보인다. 마을은 층층을 이루었지만 일주 도로 아래에 형성되어 있다.
섬의 동쪽 끝 해안에는 ‘솔중매’라는 곳이 있다. 옛날에는 소나무 숲이 해안 경치와 어울려 자랑할 만했던 곳이었으며, 지금은 없어졌지만 우리나라 최남단 봉화대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약산도에는 약초와 함께 대나무가 많다.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생하는 섬 죽도(竹島)가 있고 대나무가 울창한 마을이라고 하여 죽리, 죽생리, 죽선리가 있다.
약산도를 돌아보니 이 섬은 정말 신의 축복을 많이 받은 천혜의 섬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섬의 해안선 길이는 45km로 마을마다 특징이 나타났다. 외해와 접한 동남 해안의 득암리, 구암리, 해동리는 침식으로 해식애가 발달하고 여와 갯바위가 많아 돔과 감성어 등 고급 어류와 전복과 소라, 성게, 해삼 등이 많다. 반면에 관산리, 장용리, 우두리, 사동리 등 고금도와 접한 서북 해안은 수심이 낮고 갯벌이 발달해 김과 미역, 다시마 등 해조류 양식과 낙지, 바지락, 갯지렁이, 숭어 등 갯벌 어업이 발달했다. 이곳 갯벌 낙지와 매생이는 전국 최상품으로 평가되었다. 약산도에서 어업이 가장 활발한 마을은 득암리, 당목리, 어두리이다. 지금도 이들 마을은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제와 갯제를 지내고 있다. 여름철에는 낭장망(조류가 빠른 곳에 설치하여 멸치를 잡는 어구)을 이용해 멸치를 잡고 전복 양식을 하며 가을에는 미역, 다시마, 톳 등 양식을 준비해 가을철 잘 관리하고 키워서 철따라 채취한 미역과 다시마는 전복 먹이로 이용하기도 한다.
흑염소와 함께 약산의 자랑은 김 양식이다. 어두리 큰 선창 앞에는 김 농사를 위해 김발 손질의 손길이 부산하다. 1970년대만 해도 약산 어두리, 장용리, 관산리 등의 김은 갯벌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알아줬다. 인공 포자가 가능해지고 채취와 가공이 기계화되면서 갯벌에서 생산하는 김은 대량 생산하는 부류식 김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재래식 김 한 톳에 당시 3천 원, 지금도 김 한 톳에 3,000여 원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때의 김 농사 벌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다에서 나는 것들은 생활 물가 오르듯 오르지 않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기 때문에 지속하기 어렵다.
산과 바다가 풍요롭던 약산도. 외지인들은 물론 주민들까지 가세해 무분별한 약초 채취로 산이 무너지고, 좋은 갯벌은 간척으로 잃고, 바다 고기는 줄어 가고 있다. 다시 산과 바다가 풍요로웠던 약산도를 꿈꾼다.
[네이버 지식백과] 약산도 [藥山島] - 척박한 돌섬을 아기자기하게 만든 약초의 섬 (한국의 섬 - 전남 완도군, 2011. 7. 25., 아름다운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