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정씨항렬표
유래
시조 정해(鄭諧)는 고려 중엽 때 벼슬을 지내고 군기감(軍器監)에 추증되었다.
그의 후손들이 나주에 정착하여 살면서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
가문의번영
시조 정해의 증손자 정가신(鄭可臣·1224~1298년)은 나주 사람으로 자는 남헌, 호는 설재(雪齋),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정가신은 나주 동강면 시중동(지금의 인동리)에서 향공진사(鄕貢進士) 정송수(鄭松壽)의 아들로 태어나 금안동에서 자랐다. 어려서 승려 천기(天琪)를 따라 상경하여 1259년(고려 고종 46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열왕 3년(1277년)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가 되고 정녕공에 봉해졌다. 이어 좌사의대부를 거쳐 추서윤으로 필적이 되고 1280년(충열왕 6년) 승지가 되었다. 1284년(충열왕 10년) 밀직학사로서 정조사가 되어 원에 다녀 왔으며, 1287년 감찰대부·판삼사사를 역임한 후 1290(고려 충렬왕 16년)년 정당문학정당문학(政當文學)으로 사의(師儀)가 되어 세자를 따라 재차 원에 들어갔다.
그 후 성절사로서 3차례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세자이사가 되었으며 그 후로 벼슬이 여러번 승배되었는데 특히 그는 명문장가로서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저술하기도 했으며 청렴결백하였다.
삼불의헌공(三不義軒公) 정초(鄭初. 1344~1423년)는 정가신의 증손으로 태종 5년(140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 호조판서를 지냈다.조선 시대에 와서는 정가신의 5세손 정식(鄭軾. 1407~1467년)이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야인정벌(野人征伐)에 공을 세워 자헌대부 (資憲大夫)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 밖의 인물로는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정국(鄭菊)과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낸 일헌(逸軒) 정심(鄭諶. 1520~1602년). 부사(府使)를 역임한 정상(鄭詳. 1533~1609년) 등이 이름났고, 임진왜란 때 용맹을 떨쳐 비장군(飛將軍)으로 일컬어진 정여린(鄭如麟. 1564~1640년)이 뛰어났다.또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사정(司正)과 용양위부호군(龍 衛副護軍)을 지낸 정기수(鄭麒壽)와 수군방어사를 지낸 정봉수(鄭鳳壽),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된 정응(鄭應), 죽우당(竹友堂) 정란(鄭瀾. 1583~1656년), 묵재공(墨齋公) 정눌(鄭訥) 등이 가문을 대표하는 후손들이다.
계 파
상서공파(尙書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호군공파(護軍公派)
가문의 문화유산
설재서원(雪齋書院) :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93호로 전남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649에 있다.
설재 정가신을 배향하기 위하여 숙종 14년(1688) 노안면 금안동에 최초로 창건되어 현재는 9위를 향사하고 있다.숙종 19년(1693) 설재 선생의 5세 손으로 세종 때에 효자정려를 받은 경무공 영모정 정식(鄭軾)이 추배되었다.숙종 38년(1712) 여름에는 향사우로 승격되어 설재서원이 되었다.경종 3년(1723) 노안면 금안동에서 영평리 영안마을로 이건하여 강당인 영모재를 건립하고, 암헌(岩軒) 신장(申檣·1381~1433)과 후손인 정심(鄭諶)을 추배하여 4위가 배향되었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훼철되었다가 1900년 영모재를 복원하여 제향하다가 1953년 서원을 복설하면서 이때 창주공(滄洲公) 정상(鄭詳), 정여린(鄭如麟), 정란(鄭瀾)을 추배하고
1988년 삼불의헌공(三不義軒公) 정초(鄭初), 묵재공(墨齋公) 정눌(鄭訥) 등이 추배되어 있다.
건물구성은 사당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전면 반칸은 개방되어 있다. 가구는 5량가이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고 전면과 남측면으로는 반칸폭의 퇴를 두었다. 내삼문이 있고, 외삼문 대신 강당 측면으로 4각 대문이 건립되어 있다.
본관지
전라남도 나주
기 타
인 구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55,648명이 있었다.